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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3. 집현전과 학자들
작성자 창고지기 작성일 2004. 4. 4. 조회수 5937
<집현전과 학자들>

집현전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 초기에 궁중에 설치했던 일종의 학문 연구 기관. 고려 시대부터 있었으나 그 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는 조선 세종 때였으며, 세조 때 사육신 사건을 계기로 해서 폐지되었다. 집현전에서 하던 일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일은 임금에게 유교의 경전과 역사를 강의하는 경연과 세자의 교육을 행하는 서연이었다. 그 밖에 집현전에서는 중요한 외교 문서를 작성하였고, 나라의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史官)의 구실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나라의 정치를 바로 행하기 위한 자료를 얻기 위해 많은 연구를 하였다. 집현전의 업적 가운데서 가장 두드러진 사실은 조선 세종 때에 한글을 창제하여 반포한 일과 많은 서적을 펴내어 우리 나라의 문화사상 황금시대를 이룩한 일이다.




▲ 세종 때 집현전으로 쓰이던 건물로서,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고종 때 재건하였다


집현전의 학자들

성삼문 신숙주 이개
정인지 최항 강희안 박팽년

★ 성삼문(成三問)

1418∼1456 조선 초기의 문신, 학자.
사육신 중의 한 사람으로 호는 매죽헌(梅竹軒)이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1438년에 과거에 급제한 뒤 집현전 학사와 수찬의 벼슬에 올랐다. 왕명에 따라 신숙주와 함께 <예기대문언독>을 편찬하여 경연관이 되어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한글 창제를 앞두고 랴오둥에 있던 명나라의 한림 학사 황찬에게 13번이나 찾아가 음운에 대한 지식을 얻어 와서 훈민정음 창제에 큰 공을 세웠다. 1455년에 세조가 단종을 몰아 내고 왕위에 오르자, 이에 반대하여 단종을 다시 왕위에 오르게 하려는 계획을 꾸미다가 발각되어 죽임을 당하였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1758년에 이조 판서의 벼슬이 내려졌다. 저서에 <성근보집>이 있다

★ 신숙주(申叔舟)

1417(태종 17)~1475(성종 6).
조선의 학자, 문신. 자는 범옹, 호는 보한재, 희현당, 본관은 고령, 공조 우참판 장의 아들. 1438년(세종 20) 진사시, 생원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친시문과에 급제, 전농시 직장을 지내 고, 1441년 집현전 부수찬이 됨. 1443년 통신사 변효문의 서장관이 되어 일본에 가서 시명을 떨치고, 귀국 도중 쓰시마도에 들러 계해약조를 체결했다. 그 후 집현전의 수찬을 지내면서 여러 번 세종의 명으로 성삼문과 함께 요동에 귀양 와 있던 명나라 한림 학사 황찬을 찾아 가 음운에 관한 지식을 듣고 와서 세종을 도와 성삼문과 함께 훈민정음 창제에 가장 큰 공 을 세움. 1447년(세종 29) 문과중시에 급제하여 응교에 특진, 이어 장령, 집의, 부제학을 역 임. 1452년(문종 2) 수양대군이 사은사로 명나라에 갈 때 서장관으로 수행하고, 이듬해 부승지 에 올라 계유정란에 참여, 정란공신 2등이 됨. 1454년(단종 2) 도승지에 승진, 세조가 즉위하자 그를 적극 보좌하여 좌익공신 1등에 예문관 대제학이 되어 고령군에 봉해졌고, 이 해 주 문사로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 병조 판서, 판중추원사 겸 판병조사, 우찬성 겸 판병 조사, 대사성 등을 역임했다. 성삼문 등의 단종 복위 계획이 발각되어 옥사가 일어나자 1457년(세조 3) 좌찬성으로서 단종과 금성대군의 처형을 강력히 주장, 마침내 금성대군을 사사, 단종을 자의하게 함. 1458년 우의정에 올라 고령부원군에 진봉, 1459년 좌의정에 승진하고, 1460년 강원 함길도 도체찰사로서 모련위의 야인을 정벌, 1462년 영의정이 됨. 예종이 즉위하자 원상이 되었고, 이해 남이를 숙청한 공으로 익대공신 1등이 되었으며, 1471년(성종 2) 성종을 잘 보좌하여 다시 죄리공신 1등에 책록, 영의정에 재 임됨. 뛰어난 학식과 문재로써 6대 왕을 섬기면서 "국조오례의", "동국정운", "국조보감", "세조실록", "영모록" 등을 찬수했다. 세종 때는 왕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은 소장 학자의 한 사람이었으나 수양 대군의 왕위 찬탈에 가담한 점에서 후세에 비난을 받았다.

★ 이 개(李塏)

1417(태종 17)~1456(세조 2).
조선의 충신. 사육신의 한 사람. 자는 청보, 백고, 호는 백옥헌, 본관은 한산, 이색의 증손. 1436년(세종 18) 문과에 급제, 1441년 저작랑으로 "명황계감"의 편찬에 참여, 훈민정음의 창 제에도 참여함. 1447년 문과중시에 급제한 뒤 사가독서하고, 1456년(세조 2) 직제학에 이름. 1456년 성삼문, 박팽년 등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발각되어 혹독한 고문 끝에 죽음. 본래 세조와도 친교가 있어 진상을 밝히도록 강요당했으나 굽히지 않고 처형당함. 시문이 청절하고 글씨를 잘 썼다. 대구의 낙빈서원, 과천의 민절서원, 충주의 노운서원, 한산의 문헌 서원, 연산의 돈암서원, 의성의 충령사, 영변의 창절사에 제향. 1758년(영조 34) 이조 판에 추증, 시호는 의열, 뒤에 충간으로 개시.

★ 정인지(鄭麟趾)

1396∼1478 조선 시대의 문신, 학자.
호는 학역재(學易齋)이며,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1414년에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벼슬이 사헌 감찰, 병조 좌랑에 올랐다. 세종의 신임을 받아 집현전 직제학, 이조 판서, 영의정에 올랐다.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학자로서 성삼문, 신숙주 등과 <훈민정음> 창제에 크게 이바지하였고, 안지 등과 함께 <용비어천가>를 지었으며, 천문, 역법, 아악 등에 관한 많은 책들을 편찬하였다. 저서에는 <학역재집>이 있다.

★ 최 항(崔恒)

1409∼1474 조선 초기의 학자, 문신.
호는 태허정(太虛亭) 또는 동량이며,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1434년(세종 16년)에 알성 문과에 급제하고, 집현전 부수찬이 되어 정인지, 박팽년 등과 훈민정음의 창제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용비어천가>의 간행에도 참여했으며 <동국정운> <훈민정음해례> 등을 지었다. 1461년에는 양성지의 <잠서>를 우리말로 번역했고, 왕명으로 <경국대전>의 편찬을 시작함으로써 조선 초기의 법률 제도를 정리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저서에 <태허정집> <관음현상기> 등이 있다.

★ 강희안(姜希顔)

1417(태종 17)~1464(세조 10).
조선의 문신. 자는 경우, 호는 인재, 본관은 진주, 지돈령부사 석덕의 아들, 희맹의 형. 1441년(세종 23) 식년문과에 급제, 돈령부 주부 등을 거쳐 1454년(단종 2) 집현전 직제학이 되었고, 1455년(세조 1)에 인수부윤으로서 사은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옴. 1456(세조 2) 단종 복위 운동에 관련된 혐의로 신문을 받았으나 성삼문의 변호로 화를 면하고 1458년 호조 참의가 됨. 시, 서, 화에 모두 능하여 삼정이라 일컬어졌으며, 정인지 등과 함께 세종이 지은 정음 28자에 대한 해석을 상세하게 덧붙였고, "용비어천가"의 주석을 붙일 때도 참여함. 세종 때 금인 소신지보와 세조 때 을해자의 글씨를 쓴 바 있음.

★ 박팽년(朴彭年)

1417(태종 17)~1456(세조 2).
조선의 문신, 사육신의 한 사람. 자는 인수, 호는 취금현, 본관은 순천, 판서 중림의 아들. 1434년(세종 16) 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 성삼문과 함께 집현전 학사로서 세종의 총애를 받음. 1438년 사가독서를 했고, 1447년(세종 29) 문과중시에 을과로 급제함. 1455년(세조 1) 세조가 즉위하자 충청도 관찰사로 나가 조정에 보내는 공문에 신이라고 칭한 일이 없음. 1456년 형조 참판으로서 성삼문,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 김질 등과 함께 단종 복 위를 도모하다가 김질의 밀고로 발각, 체포된 후 그의 재능을 아끼는 세조의 회유를 끝내 거절하고 사형당함. 뒤에 아버지, 동생 대년, 아들 헌도 사형됨. 과천의 민절서원, 홍주의 노 운서원 등 여러 사원에 제향, 이조 판에 추증, 시호는 충정.

@자료 출처 : 계몽 웹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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