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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충무공 이순신의 자결 견해
작성자 알짜돌이 작성일 2004. 4. 4. 조회수 5552
이순신 장군이 최후의 전투인 노량 해전에서 갑옷을 입지 않고 진두 지휘하다가 적탄을 맞은 것은 이순신 장군 스스로 자신의 최후를 부끄럼 없이 장식하기 위해 장렬하게 자살한 것이라는 설이 설득력 있게 퍼져 있다. 그것은 당시 정치의 역학 관계를 볼 때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로 여겨졌다. 이순신 장군은 평소에도 자신의 진퇴에 대해 분명하게 말하곤 하였다. 후에 삼도 수군통제사가 된 유형은 이순신 장군이 평소에 갖고 있던 결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이순신 장군이 평소에 마음 속을 토로하며 '예로부터 대장이 자기가 세운 전공에 대해 인정을 받으려는 생각을 조금이라도 갖는다면 대개는 생명을 보전하기 어려운 법이다. 나는 적이 물러나는 그 날에 죽음으로써 유감 되는 일을 없애도록 하겠다'라고 말했다." 이는 이순신 장군이 적이 물러나는 마지막 전투에서 '반드시' 죽겠다는 비장한 내용으로 이순신 장군의 죽음이 결코 통상적인 전사가 아니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이때의 정황을 자세히 알아보자. 1597년 7월 15일 왜적의 700여 척에 달하는 대 함대는 원균이 거느린 200여 척의 우리 병선을 전멸시키고 이 전투에서 원균도 전사하였다. 이 패전 소식에 조선에서는 백의종군하던 이순신 장군으로 하여금 삼도 수군통제사에 부임케 하였다. 어명을 받은 장군은 8월 3일에 장병 60여 명을 거두어 순천으로 내려가 남아 있는 배 12척으로 진도에서 전투에 참가하였다. 9월 16일에는 진도 명량해협에서 적선 333척을 만나 포위를 받으면서 30여 척을 부쉈다. 이로써 이순신 장군은 다시 남해의 해상권을 회복하게 된다. 그 해 7월에 명나라 수군 제독 진린(陳麟)이 5천 명의 수군을 거느리고 와서 조선 수군과 합동으로 순천에 주둔하고 있는 소서행장의 군을 해상에서 포위, 적의 해상 교통을 봉쇄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전황이 바뀐다. 8월 17일에 풍신수길이 죽자 그의 명에 의하여 왜적은 철수의 길에 오르게 된다. 순천에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이순신 장군이 해상을 봉쇄하고 있기 때문에 용이하게 빠져나갈 수가 없게 되자 진린에게 뇌물을 주어 퇴로를 열어달라고 한다. 진린은 퇴로를 열어주자고 하였으나 이순신 장군은 듣지 않았다. 이에 왜적들도 일전을 각오하고 소서행장은 곤양과 사천 방면의 왜군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구원병들이 노량(鷺梁)으로 모여들었다. 이때 왜군의 배는 500여 척, 조선의 수군과 명군의 배는 300여 척이었다. 이 전투에서 비록 충무공은 전사하였지만 왜선 500여 척 중 450척이 부서지고 왜장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등을 비롯한 일부가 고작 50여 척으로 도망칠 정도로 조선 측의 대승이었다. 그때가 선조 31년 11월 19일이였다. 이 전투에서 이순신 장군의 죽음이 자살이라는 데 비교적 많은 공감을 받고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그때 그가 죽지 않았다면 어차피 또다시 잡혀가서 억울하고 욕되게 죽음을 당했으리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이와 같은 가설이 나오게 되는 당시의 정황을 알아보자. 여기에는 선조의 성격이 크게 작용한다. 선조는 변덕스럽고 의심이 많았는데 왜란이 일어날 조짐이 보이자 더욱 불안해져 의심나는 사람을 닥치는 대로 미리 죽였다. 특히 정여립 역옥 사건으로 인하여 1,000여 명의 죄 없는 사람들을 마구 죽였는데 그 정도가 얼마나 심하였는지 자살한 정여립에게 다시 형벌이 가해지던 날 어떤 사람이 안질 때문에 눈물을 흘리자 정여립을 추모하고 있다는 죄명으로 곤장을 쳐죽이기도 했다. 이순신과 친분이 있었던 조대중도 그의 죽음을 슬퍼하여 울었다는 죄목으로 고문을 받고 죽었으며 그의 처와 첩, 아들과 딸, 동생과 조카 등이 모두 죽었다. 선조가 이순신 장군을 체포할 때도 금부도사에게 선전관의 신표와 밀지를 주어 신분을 위장하고 이순신 장군을 잡아오게 하였다. 금부도사는 먼저 선전관의 자격으로 10여 일을 한산도에 머물면서 이순신 장군의 동태를 엿본 다음 이순신 장군을 잡아온다. 선조가 이순신 장군을 체포하도록 명령한 것은 다음 4가지 죄목이다. "이순신은 조정을 속였으니 임금을 업신여긴 죄를 범했다. 또한 적을 쫓지 않았으니 나라를 등진 죄도 범했다. 게다가 남의 공을 빼앗았고 모함했다. 뿐만 아니라 방자하고 거리낌없는 죄를 저질렀다. 이런 여죄가 있으니 내 비록 그를 아끼나 그를 구할 방법이 없다." 이순신 장군이 받았던 죄목의 진실 여부는 알 수 없으나, 당시 이순신 장군을 추천하였던 유성룡조차 몇 가지 석연치 않은 이순신 장군의 행동 때문에 적절히 변호하지 못하였다. 실제로 선조는 우부승지 김홍미에게 이순신의 죄목에 대해 자백을 받은 후 사형에 처하라고 지시까지 한다. 그러나 정탁을 비롯한 여러 신하들이 전투 중에 군사령관을 사형에 처하는 것은 왜병에게만 도움을 줄 것이라고는 구명 상소문을 올려 이순신 장군의 목숨만은 구하게 된다. 극적으로 생명을 건진 이순신 장군은 1597년 7월 원균의 패전으로 다시 삼도 수군통제사가 된 후 패잔선 12척으로 명량해전에서 또다시 대승을 거둔다. 선조가 이순신 장군을 죽이려 했던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이순신 장군을 더 미워하게 되었으리라는 점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선조 실록 1597년 10월 20일을 보면 선조는 명량해전에 대해 '이순신은 사소한 적을 잡은 데 불과하다. 이순신에게는 벼슬을 올려주지 않으면서 포상하는 방법을 연구해보라'고 말하면서 포상도 거부한다. 특히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이후에도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해전인 노량해전의 승리도 대수롭지 않다고 했다. 선조는 임진왜란, 정유재란 등을 통해서 자신의 존립이 위태해진 것을 경험하였으므로 전쟁이 끝나자 왕권에 대해 병적인 집착을 갖고 있었다. 그러므로 전쟁이 끝난 후의 논공행상에서 이순신, 권율, 원균 등 사망한 사람만 선무 일등 공신으로 추서한다. 곽재우, 이원익 등 살아있는 사람들은 1등 공신으로 추천되었으나 아무런 상을 받지 못하였다. 선조로서는 살아있는 사람에게 영웅 칭호를 준다면 안심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러므로 이순신 장군의 죽음이 스스로 택한 죽음이라는 견해는 많은 사람들의 동조를 받았다. '적의 유탄을 맞았다'는 사실과 '스스로 전장에서 영광스럽게 죽음을 맞는다'라는 것이 상당한 차이가 있음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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