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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히틀러...!!
작성자 알짜돌이 작성일 2004. 4. 4. 조회수 2827
히틀러...무써븐 사람!!
-알짜돌이-



히틀러의 생애

1889년 4월 20일, 오스트리아 인(Inn) 강변의 브라우나우에서 아돌프 히틀러는 자수성가한 세무 관리 알로이스 히틀러의 아들로 태어났다. 1905년 16세의 실업고등학교 3학년인 히틀러는 폐병에 걸려 학업을 중도에 그만 둔다. 병이 나은 후 히틀러는 1907년 가을에 비엔나에 있는 조형예술 아카데미에 소속된 일반화가 학교에 입학하기 위한 시험을 두 번에 걸쳐 치지만 낙방했으며, 1909년 12월에서 1913년 5월까지 비엔나에서 병역 기피로 인해 오스트리아 경찰의 수배를 받으며 숨어 살았다. 1913년 5월 그는 비엔나를 탈출하여 뮌헨으로 이주한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히틀러는 독일 군대에 지원한다. 사회와는 달리 군대에서 그는 인정받는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는 전령병으로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하여 1,2급 철십자 훈장을 받는다. 1919년 독일은 굴욕적인 항복을 하기에 이른다. 전쟁이 끝나자 그는 연설자로서 나치당의 전신인 독일노동당 집회에 참가하며 정당의 선전부장이 된다.

탈당과 최후 통첩 그리고 재입당 등의 과정을 거친 히틀러는 1921년, 드디어 독재 권한을 지닌 나치당의 당수가 된다. 1923년 뮌헨에서 히틀러는 쿠데타를 감행한다. 그는 체포되고 5만 여명에 이르는 나치당의 활동은 금지되었다. 1924년 재판에서 5년형을 선고받고 란츠베르크 감옥에 투옥된 그는 그곳에서 「나의 투쟁」을 집필한다. 그해 말 집행유예로 조기 석방된 그는 이듬해 나치당을 새로이 창당한다. 제국 의회 선거에서 나치당은 1932년 37.4%를 획득하며 집권에 성공한다. 1934년 8월 대통령 힌덴부르크가 죽자 히틀러는 지도자, 대통령, 제국 수상, 당 총재라는 네 개의 공직을 모두 소유하여 전무후무한 절대 권한을 휘두르게 된다.

1939년 9월 1일 히틀러는 폴란드에 공격을 개시함으로써 유럽 전역을 전쟁의 공포 속으로 몰아 넣는다. 그러나 소련과 영국의 반격, 미국의 참전 등은 전쟁 국면을 반전시킨다. 1945년 4월 30일 히틀러는 제국 수상청의 참호에서 애인 에바 브라운과 마지막 순간 결혼하고 그녀와 함께 자살한다.

히틀러 세계관의 뿌리

히틀러의 세계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청년 시절을 보낸 오스트리아의 분위기와 1차 세계대전의 배경을 이해해야 한다. 19세기말에서 20세기초에 이르는 시기의 오스트리아는 여러 민족들이 모여 사는 군주국이었다. 오스트리아의 번화한 수도 비엔나는 행운을 찾는 사람들을 끊임없이 유혹했다. 1차 세계대전 전에 16만의 유대인이 비엔나의 200만 주민 속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정부의 느긋한 자유 방임은 암암리에 종족간의 증오를 키우고 있었다. 비엔나의 시장 칼 뤼거는 밀려드는 유대인들에 대해 반유대주의를 표방하여 시민들의 호응을 얻어내었다. 저지(低地) 오스트리아의 봉건 영주인 폰 쇠너러는 뤼거보다도 더 급진적이었다. 애국적인 열정과 광신적 종족주의로 무장한 열광적 대독일주의자였던 쇠뇌러는 ‘순수 독일인이 아닌 주민들’을 추방하려는 목표를 세웠으며 반(反)유대적인 분위기를 조성하고자 애썼다. 뤼거와 쇠너러는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오스트리아 다민족 집단의 분위기를 박해의 독기로 오염시켰다.

히틀러는 뤼거와 쇠너러의 영향을 받았다. 그들의 사상은 히틀러 정책의 세 가지 주요 이념으로 긴요하게 사용되었다. 독일인만 모여 사는 신게르만적 대공간, 반유대주의, 반마르크스주의가 바로 그것이다.히틀러는 항상 자신의 불안한 존재가 사회적 신분 하락으로 전개될 수 있다는 걱정에서 살았다. 일자리를 얻기 위해 무일푼으로 이주한 수십만 유대인들의 노력에서 자신은 배제되고 신분 하락을 경험할 것이라는 사실이 분명해 보였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그 당시 상황은 어떠했는가? 서로 적대 관계에 있는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라는 19세기의 두 가지 근본 사상이 20세기로 이어졌다. 사회민주주의는 초국가적이고 반(反)엘리트적인 사상으로 간주되었다. 열정적 애국자일수록 그만큼 더 마르크스주의자를 경멸했으며, '세계 혁명'이라는 그들의 구호를 두렵게 생각했다.

히틀러는 이미 초창기에 사회주의의 반대자였으리라 생각된다. 무위도식하던 청년 히틀러는 고용살이를 할 정도로 궁핍하지는 않았다. 또한 그의 어느 정도의 품위를 유지하는 예술적 취향은 그 사상에 빠져드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사회주의에 대한 막연한 반감이 투쟁적으로 전환되었던 중요한 계기는 전방의 부상당한 병사였던 히틀러가, 대부분의 그의 전우들과 마찬가지로 독일의 패전은 사회주의자들로 인한 후방의 배반 때문이었다고 확신하고 있었던 1918년으로 추정될 수 있다.

히틀러는 전쟁 전에 이미 그럴듯한 사상의 연합을 발견했다. 그것은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결합이었다. 이 두 가지가 합쳐질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보헤미아에 사는 독일 노동자는 어떻게 생각했던가? 그들은 외국에 거주하는 독일인으로서 조국애를 느꼈다. 동시에 그들이 사회주의자이길 원했다면, 사회주의의 핵심 요소인 반국가나 초국가적인 사고가 조국애와 결합되었다. 그 결과 새로운 정치적 융합인 민족사회주의, 즉 나치가 성립되었다.

선동가 히틀러

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히틀러는 전쟁 전의 보헤미안적인 방랑생활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군대에서 제대한 그는 반유태주의와 반마르크스주의를 표방하고 민족주의 성향이 강했던 독일노동당에 입당한다. 그는 독일노동당의 노동위원회에 가입한 순간부터 정당 활동가로서 정력적이고 단호하며 목표의식이 투철하게 일했다. 선전부장 히틀러는 우직한 당수를 감동시킬 정도의 근면함을 보여주었다.

후방의 배반으로 전쟁에 패했다고 생각한 군대는 이제 민족주의 성향의 고취에 앞장서려고 하였다. 이런 목적으로 히틀러가 대중 연설가로 발탁되었다. 히틀러의 언변은 입증되었다. 그의 연설을 처음 들은 청중들은 무엇에 홀린 듯이 그의 말을 경청했다. 그는 항상 모터가 추진되듯이 전진하고, 대중 집회의 흐름에서 말의 홍수, 땀, 엑스터시(황홀경)로 대중을 사로잡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가 완전히 탈진하여 몇 킬로그램 가벼워져서 연단을 떠날 때 받는 우레 같은 갈채는 그에게 마약을 복용할 때 느끼는 것과 같은 희열과 계속 새로이 복용해야 하는 만족할 줄 모르는 갈망을 주었을 것이다. 연설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마약을 주지 않는 것과 같았다.

선동가의 성공은 혼란의 시대, 뿌리가 없는 상황, 곤궁, 실망한 이상 등을 전제로 한다. 히틀러는 자기의 재능만을 신뢰하지 않고, 세밀하게 전문적인 수단도 연구하였다. 때때로 오페라 가수가 그에게 말하기를 가르쳐 주었다. 그는 거울 앞에서 손의 위치와 표정의 움직임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조사하였다. 그는 웅변가의 표현형을 자유롭게 조절하기 위해 갈고 닦았다.

“모든 유의 선전은 대중적이어야 하며, 정신적 수준을 대중들이 제대로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극히 제한된 것으로 잡아야 한다. 그럼으로써 그들의 정신적 수준이 낮으면 낮을수록, 그것을 이해하는 대중의 수는 많아진다. 대중의 수용 능력은 매우 제한되어 있다. 이해력의 범위는 적고, 이해한 것도 아주 잘 잊어버린다. 이런 사실을 볼 때, 효과 있는 선전은 단지 몇 가지 점으로 제한되어야만 하며, 연설 중 최후의 특정한 말은 원하는 것을 상상하게 해줄 정도로만 길게 구호를 외치듯 사용해야 한다.”- 자서전 『나의 투쟁』에서 -

정치가 히틀러

히틀러는 14년 동안 집권했다. 그 중 12년은 독재였다. 그 시기에 국가의 역사는 개인의 무대였다. 국가와 히틀러 개인이 거의 동일시되었다. 제국 의회 선거에서 나치당은 1928년 2.6%, 1930년 18.3%, 1932년 37.4%를 획득하며 승승장구한다. 1933년 7월 정당 금지법이 관철됨으로써 독일은 일당 독재 국가로 변한다. 11월 단독으로 출마한 나치당은 92%의 찬성표를 획득한다. 1934년 8월 대통령 힌덴부르크가 죽자 히틀러는 지도자, 대통령, 제국 수상, 당 총재라는 4개의 공직을 모두 소유하여 전무후무한 절대 권한을 휘두르게 된다.

독일 경제의 대공황, 사회주의자들의 배반으로 전쟁에 패배했다는‘배후 음모설’, 바이마르 공화국의 무능력과 무정부 상태로 이르는 정치적 불안, 1919년 뮌헨에서 2주간 계속되었던 인민 공화국을 본보기로 한 볼셰비키 혁명에 대한 공포 등이 함께 어우러져 나치의 출현을 가능하게 했다.

히틀러의 국내 정치는 경제 부흥, 독재 정권 확립, 유대인 박해라는 세 가지 방향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는 우선 '노동절'을 공휴일로 선포하였다. 그것은 노동 단체가 70년 동안 투쟁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바로 다음날 노동 조합이 금지되었고, 고용자, 노동자, 관리로 구성된 강제 조직 '독일 노동 전선'이 곧바로 창립되었다. 그리고 곧 이어 실업률을 억제시키는 최초의 법률이 제정되었다. 1933년 9월에 히틀러는 프랑크푸르트와 하이델베르크를 잇는 고속도로 건설에 ‘첫 삽질’을 함으로써 ‘노동과의 전쟁’을 시작했다. 국가는 부채를 고려하지 않고 일자리를 조달하였고, 자급 자족의 경제, 물가와 임금을 동결하는데 기술적으로나 방법적으로 성공했다. 1933년 실업자의 수는 히틀러 집권 전의 약 3분의 1 수준인 400만으로 떨어졌다.

1933년 나치를 제외한 모든 정당이 스스로 해산하고, 사회당은 정당 활동이 금지되었다. 7월에 정당의 새로운 창당이 금지되었다. 교황청과 제국의 종교 협약은 독일 카톨릭 교회가 우호적으로 중립을 지킬 것을 강요했다. 심지어 사람들은 히틀러식 인사를 하는 카톨릭의 성직자도 목격했다. 그리고 히틀러는 정권 창출을 위해 앞장섰던 SA(나치 돌격대)를 없애고 대장 룀을 숙청했다.

히틀러가 집권하자마자 유대인 가게에 대한 보이콧(불매운동)이 시행되었다. 1935년 9월 15일 제정된 ‘뉘른베르크 법’은 ‘독일 혹은 아리안족의 피를 지닌’ 국민과 유대 인간의 결혼을 금지하였다. 약 3분의 1에 해당하는 17만 명의 유대인이 망명을 했다. 공공 의자에 않는 것을 금지하는 조항에서부터 ‘제국 투명의 밤’에 조직된 유대인 박해에 이르기까지, 국립 학교의 유대인 자녀 배제에서부터 입주자 보호권리의 소멸에 이르기까지, 의사나 검사 자격의 박탈에서부터 황색별에 이르기까지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단계적으로 박탈당했다.

국외 정치적으로 히틀러는 비스마르크보다 더 강력하게 처신했다. 그는 전쟁을 치르지 않고 조약 위반과 강한 압박으로 놀라운 결과를 일구어 내었다. 병력 증강, 서방 권력의 분산, 베르사이유 조약의 무리한 요구, 프랑스의 국내 불안, 숙청을 통해 약화된 러시아, 독재자인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우정 등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1935년 주민 91%의 찬성으로 자를란트를 독일에 재편입시켰으며, 36년 로카르노 협정을 파기하여 비무장지대인 라인란트를 합병하고, 38년 베르사유 조약을 파기하고 오스트리아를 손아귀에 넣었다. 38년 체코의 주데텐 지역을 국제적으로 압력을 가해 독일에 편입시킨다.

장군 히틀러

1939년 8월 독일은 소련과의 불가침 조약을 비밀리에 성사시킨다. 히틀러는 자신의 계획에 따라 진행하려고 했던 전쟁을 동쪽에서 외교적으로 보장받음으로써 지체없이 실행했다. “나는 이제 독일 제국의 첫 군인에 지나지 않기를 원한다! 그럼으로써 나는 나에게 가장 성스럽고 가장 값비쌌던 그 제복을 다시 입을 것이다. 나는 그 옷을 반드시 승리한 후에 벗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나는 종말을 더 이상 살아서 체험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항복이라는 단어를 결코 알지 못한다. 1918년 11월(1차 세계대전에서의 패전)은 독일 역사에서 결코 되풀이되지 않을 것이다!”

1939년 9월 1일 독일군의 폴란드 진군이 시작되었다. 영국이 신속하게 이에 대응하였다. 히틀러와 군부는 영국의 선전포고에 당황하였다. 독일은 대영제국의 무진장한 예비군과 미국에 대항하는 것이 얼마나 힘드는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우려는 잠깐 동안의 기우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1차대전 때 4년 동안 엄청난 피의 희생을 치르고도 성공하지 못했던 프랑스 파리로의 진군을 상병 출신의 히틀러는 그 당시 6주만에 이루어 내었다. 프랑스에 이어 네덜란드, 벨기에, 유고슬라비아, 그리스 등이 단 몇 주만에 항복했다. 흥분의 도가니였다. 시작 단계에 나쁜 종말을 가져올 것이라는 회의는 이제 사라지고 과장된 현실이 목격되었다.

영국을 제외한 서방 세계의 항복을 받아 낸 히틀러는 다음 계획을 실행했다. “내 인생의 성스러운 사명을 위한 진정한 투쟁에서 몸과 마음을 바쳐 생의 목표인 민족사회주의의 실현과 볼셰비키를 박멸하기 위해 돌진할 수 있을 것이다. 동쪽으로, 유일하게 남은 동쪽으로 우리의 생명선이 확장되어야만 한다.” 스탈린과의 불가침 조약을 무시하고 러시아 공격에 대한 계획이 강행되었다. ‘그때까지 세계에 일어났던 것’ 중에서 가장 거대한 300만 명이 동원된 ‘바르바로사’라는 작전의 진군이 시작되었다. 소련 측의 방어 계획은 감지되지 않았다. 그러나 1941년 5월 15일에 러시아 공격을 감행한다는 일정표는 지켜질 수 없었다. 그 이전에 독일은 유고슬라비아 전투에 이어 그리스에서 이탈리아를 도와주어야만 했다. 히틀러는 자신을 도와주었던 무솔리니에게 약속한 것을 지켰다. 그러나 그 대가는 실로 엄청났다. 무솔리니로 인해 한 달 이상 지연된 작전은 실패를 잉태하고 있었다. 월동 준비를 갖추지 않은 독일 군대에 기습적으로 닥친 러시아의 초겨울은 전쟁의 전환점이 되었다. 스탈린그라드의 패전 이래로 완만하지만 끊임없는 퇴각이 시작되었다.

히틀러의 광기가 끼친 영향

히틀러가 집권했던 12년 동안 독일은 악마의 길을 가고 있었다. 히틀러 정권의 출발은 분명 독일 국민에게 기대감을 주었다. 그는 실의에 빠진 국민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 주었고, 경제 위기를 극복하고 물가와 임금을 잡는 데 성공했다. 이런 성공으로 독일 국민은 그에게 환호했을지라도, 그가 인류에게 자행했던 일련의 만행은 결코 연대 책임으로 변명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600만 명의 유태인을 학살했고, 600만 명의 독일인과 2000만 명의 러시아인을 죽음으로 몰아 넣은 전쟁이라는 악마의 선택을 강요했다.

유태인 학살에 대해서는 모두가 침묵했다. 그 침묵에 교황청도 포함된다. 아우슈비츠에서 동료 죄수를 대신해 죽은 콜베 신부, 나치의 잔학한 범죄에 대해 공개 비판하다 끝내 다차우 집단수용소에서 숨진 리히텐베르크 수도원장 등, 많은 사제와 카톨릭 신자들이 나치 반대의 깃발 아래 모진 고문을 받거나 순교했는데도 교황 비오 12세는 치외법권의 보호를 받으며 히틀러에 대해 규탄과 항거의 명백한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는 것은 종교계의 오점으로 남는다.

역사는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에게 모델로 나타날 때가 많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TV 사극을 현대 정치와 비교하길 주저하지 않는다. 대중이 원하든 그렇지 않든 히틀러와 같은 인물은 시대의 산물로 나타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의 출현을 저지하는 것은 대중의 몫이다.

@출처: 최경은 박사(독어학, 연세대,홍익대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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